86년생 05학번인 나의 대학 시절 주수입은 과외 아르바이트였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나름대로 우리 동네에서 이미지 반듯한 모범생이었으므로 나라 경제는 어려워도 나만은 호황이었다. 특히 한창 예민한 사춘기 딸을 둔 학부형들이 여자 과외 선생님을 선호하는 분위기가 있어 더했다. 하지만 부모도 예민하다며 손사래치는 소녀들인데, 생판 남인 나는 오죽했을까?
심리학 용어 중 라포(rapport)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인류학의 현장 연구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지는 개념인데, 연구 혹은 관심 대상과의 신뢰와 친밀감을 전제로 한 공감대 형성을 의미한다. 나는 분명 갓 십대를 벗어난 여대생이었지만, 워낙 애늙은이 같은 성격에 소녀 감성도 부족해서 사춘기 여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과외 선생 자리는 학생의 호감을 얻지 못하면 파리 목숨이나 다름없으므로, 공부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아이들과 라포를 잘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십대 소녀라는 종족과 소통하기 위해 잘 알지도 못하는 아이돌 그룹들을 공부했다. 아이돌 멤버들의 생일, 팬클럽 이름, 예능 프로그램에서의 활약, 기타 등등. 한때 나는 학생에게 역행렬의 계산 순서를 가르치기 위해 샤이니의 안무 대형을 인용하고, 고려의 토지 제도인 전시과 개정 순서를 동방신기의 노래에 맞춰 암기하게 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나 같은 과외 선생이 있는데 어떻게 성적이 안 오를 수가 있겠는가?
얼마 전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유명 걸그룹 멤버 이야기가 나왔다. 과외하던 시절이 생각나 검색해 보니 무려 2001년생이었다. 2005년 최고 인기였던 동방신기의 영웅재중이 나와 동갑인 86년생인데, 2001년생이라니! 오랜만에 한국에 계신 엄마와 통화하며 요즘 애들이랑 세대 차이 느낀다고 한탄했더니, “놀고 있네,” 하신다. 저렇게 어린 친구에게 핫팬츠를 입혀서 춤추게 내버려둘 수 없다고 열을 냈더니, 남편이 “꼰대 같다,” 했다.
아마도 나는 꼰대가 맞다. 세상 변하는 게 너무 빠르고 정신없어 꼴 보기 싫다고 뉴스도 잘 안 본다.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소설은 1818년에 나왔고, 70대의 도널드 트럼프도 매일 하는 트위터를 가입해본 적도 없다. 더 늦기 전에 새로운 세계와의 라포를 쌓아야 하는 게 아닐까? 언젠가 2017년생 아이돌이 나와도 의연하고 싶으니까.
<
이현주(주부)>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