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동의 긴 겨울 몰아내고 얼어붙은 대지와 움츠린 사람들의 얼굴에 따스한 햇살 비추는 날. 흙 밑에 숨겨진 풀씨들 성급하게 언 땅을 뚫고 소복이 올라온 연녹색의 새싹들이 방긋 미소 짓는 봄의 시작을 알리는 입춘도 지났다. 늘 마음은 아직도 때 묻지 않은 순수한 열여덟 살 풋풋한 봄맞이 소녀이고 싶은데, 흐르는 세월의 강에 떠밀려 중년을 넘어 노년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하루하루 흐르는 시간을 붙잡아두고 싶을 만큼 아쉽고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얼굴에 배어 나오기에 이제는 자신의 얼굴에 책임져야 할 때다.
1972년 12월 고국을 떠나 온 나! 어느 누구도 관심 갖지 않는, 아니 묻지도 않는 나의 이민의 삶 40여년 세월의 흔적을 더듬어 보게된다. 이민초기 밀어닥치는 향수병이 날씨만큼이나 매섭게 추워 얼마나 많이 울었던가, 이민의 삶을 위해 경험도 없이 일이 주어지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던가. 어린 딸들을 베비시터에게 맡기고 울어대는 아이들의 울음소리는 직장에서 일하는 시간내내 메아리쳐 얼마나 마음 아팠던지. 때론 예기치 않았던 병마에 시달리며 고통의 시간을 보내기도 했고 실직하고 새 직장을 찾느라 동문서주 하던 일들, 우체국 직원이 되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 하느라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던가.
딸들은 착실하게 성장해주었고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 연년생으로 낳은 여덞 명의 손주들 뒷바라지하느라 동문서주 하던 할머니의 바쁜 세월도 지나, 어느 덧 대학생이 된 큰 손녀, 모두가 10대가 된 손주들의 대견함속에 가끔 가족모임 속의 즐거운 시간을 갖곤 한다.
이제 난 인생을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바람부는 겨울, 꽃피는 봄, 파도치는 여름, 황금빛 가을, 이것이 인생의 진한 한바탕이라면 그것대로의 영원한 질서와 그것을 밟고 가는 인생의 행로가 있는 것처럼 세상과 더불어 늙는 것이 아니라 이상을 잃을 때 늙는다고 생각한다. 물론 세월의 흐름에 따라 피부에 주름이 늘게 되겠지만 그러나 난 이 세상일에 흥미를 가지고 있는 한 마음의 주름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이젠 머리에 내린 하얀 서리가 그렇게 싫지 않고 오히려 삶의 흔적을 담은 내 모습이 그런대로 나를 지킴이 오히려 자랑(?)해도 괜찮은 오늘의 나다. 돈키호테를 쓴 세르반테스는 “지나간 일을 되돌아 추억한다는 점에서 인간을 강과 다르다”고 한다. 또한 피천득 선생은 “과거를 역력하게 회상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장수하는 사람이며 그 생활이 아름답고 화려하였다면 그는 비록 가난하더라도 유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예전을 추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의 생애가 아무리 찬란하였다 하더라도 감추어둔 보물의 세목과 장소를 잊어버린 사람과도 같다”고 했다. 피 선생의 말대로라면 아름답고 화려한 과거의 추억은 감추어둔 보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래선가 때때로 지나쳐간 수많은 세월!
그때 그 시절의 추억들이 빛바랜 앨범 속의 흑백사진처럼 아련하게 떠올리는 시간이 부쩍 많아진 걸 보면 깊이 감추어두었던 보물이 내게도 수북 수북이 쌓여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40여년 세월 속의 추억이 중요한것이 아니라 앞으로 삶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함을 느끼게 된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 세월의 흐름 속의 점점 100세 장수시대로 가고 있다. 규칙적인 생활 속에서 남은 세월을 허송치 않는 부지런함과 날마다 범사에 감사하면서 기쁨과 사랑이 넘쳐나는 보람된 삶이기를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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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설자 수필가 애난데일/ 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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