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양이 아름다운 집을 동경한다. 커다란 창으로 석양빛을 온전히 들일 수 있는 집.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며 저녁노을과 눈길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이다. 문장을 퇴고하듯 날마다 새로운 빛으로 태어나는 석양처럼 나 자신을 퇴고할 수 있는 저녁을 생각한다.
우리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석양 뷰를 가진 집이 패트릭 할아버지네다. 저녁밥을 일찌감치 먹은 날 찌뿌둥한 하루를 토닥이면서 골목을 종으로 횡으로 걷다가 집 뒤편으로 펼쳐지는 노을빛에 발길이 딱 멈추는 곳. 겹겹이 붉게 타오르는 하늘을 정면으로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열게 되는 집. 남편과 아내의 나이를 합쳐 이백 살 가까운 부부의 집이었고 이제는 새 주인을 기다리며 오렌지나무 세 그루가 석양에 익어가는 집.
다섯 달 전, 그들 부부가 조용히 동네를 떠났다. 거동이 어렵고 집에서 받을 수 있는 돌봄이 한계에 이르러 어시스티드 리빙(Assisted Living)에 입주한 것이다. 몇 년 전부터 변호사와 조카들이 드나들면서 이런 날이 오리란 것을 예견했지만 막상 비어 있는 집을 지날 때면 이웃으로 살았던 삼십 년 세월이 나의 발등에 내려앉아 쓸쓸한 마음이다. 우리 동네 최초로 지은 집에서 오십 년 넘게 살아온 삶을 정리하고 떠나는 마음은 어떠했을까. 노란 불빛이 새어 나오는 이웃집 사이에서 까맣게 침묵하고 있는 창문을 볼 때마다 울컥한 심정이 되어 우리가 나눴던 마지막 대화를 떠올리곤 한다. “우리 동네에 왜 가로등이 없는지 아니? 깜깜할수록 밤하늘에 별이 더 잘 보이거든.”
몇 주 전 그 집 앞에 에스테이트 세일(estate sale) 팻말이 세워졌다. 주말 이틀간 아침 일찍부터 동네가 부산스러웠다. 에스테이트 세일은 주로 집 주인이 사망했을 때 하게 되지만 이번 경우는 자녀가 없는 패트릭 할아버지네를 대신해서 조카딸이 대행업체를 고용하여 미리 집 정리를 감행한 것이다.
타인의 집 내부를 속속들이 들여다보기는 처음이었다. 마치 배를 갈라서 내장을 보고 있는 느낌이랄까. 침실과 화장실, 부엌 서랍은 마치 벌거벗은 모습이었다. 덩치가 큰 진열장, 식탁, 책상부터 액자, 식기류, 도자기, 공구함 4개에 든 작은 나사 하나까지 살펴보고 필요한 것을 골라 바구니에 담는 사람들 틈에서 나는 부부가 매일 사용했음 직한 부엌의 타원형 나무 쟁반과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북적거리는 소음 속에서 시간 여행을 하는 것처럼 서성거렸다. 주인장만큼 나이 들어 보이는 원목 책상과 까만 타자기의 둥근 모양 알파벳 자판을 꾹꾹 눌러 보았다. 중앙 벽에 걸려 있는 단체 사진 액자를 내 휴대전화 카메라로 다시 찍었다. 그들 부부를 포함한 수십 명의 부부 단체 사진. 미 해군이었고 한국전에도 참전했던 할아버지 이력으로 보아 퇴역 군인들 모임이 아닐까…. 사진 속 그들은 모두 싱싱한 유월의 잎들 같았다.
오늘 그 집 앞을 지나다가 보니 현관 앞에 낡은 카펫 몇 장이 둘둘 말려진 채 놓여 있다. 문밖에 나앉은 그 카펫들은 이제 다시 펼쳐질 일이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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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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