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가 귀찮고 귀찮다.
한국에 다녀온지가 한달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게으르게 늘어져있다. 남이 해준 밥 먹고 남이 운전해주는 차 타고 다니고 남의 집에서 잘 때가 좋았다. 이래서 마님 팔자가 좋은가 보다. 물론 나도 미국에 돌아가면 살림의 여왕인 친구들 처럼 건강하고 맛난 음식을 만들고, 그들의 살림처럼 반들거리고 반짝거리게 하려고 여러가지 살림살이도 마련해왔지만 창고에 봉지째로 박혀있다.
집으로 돌아오니 모든것이 줄 서서 우리를 기다린다. 눈 덮였던 잔디는 미친듯이 제멋대로 온갖 잡초와 뒤엉켜있고 텃밭은 황량하다. 마켓엘 가니 온갖 모종이 나와 있지만 너무 어려서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해마다 얼어 죽이는 나를 반성하며 되돌아서다가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쩝쩝거린다. 겨울 내내 톱밥 발효제로 삭혔지만 아직도 똥 냄새 풀풀 나는 거름을 텃밭에 쏟아 부었는데 다행히도 날이 추워져서 창문을 꼭꼭 닫고 있고 까칠한 이웃들이 아니길 다행이다
2주 뒤에 결전의 날이 왔다. 저 멀리 뉴저지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생전 처음 피정도 하고, 원장 신부님의 축복을 받았으니 절대로 죽지 않을 더덕을 얻어오고, 튼튼한 모종으로 유명한 농장에서 사온 온갖 모종들을 하루종일 심었다. 지난 해에 받아둔 호박 오이 상추씨도 컵안에서 잘 키워서 이제부터는 얼어죽든 말든 니네 팔자라며 굳세게 자라라고 기도를 한다. 그런데 다음주 부터 유난히 꽃샘 추위가 심하다고 해서 가슴 조이게 했지만 이제 한시름 놓았다. 짠! 이제부터는 온갖 동물과 새가 나타나면 반짝번쩍이는 불빛과 삐릭삐릭 초음파 소리가 나는 첨단기계들이 작동한다 그래! 전기세와 베터리 값은 남편이 벌어오니 걱정말고 잘 자라거라.
등록만 해놓고 한달은 빼 먹은 성당학교도 부지런히 다닌다. 음치인 내가 그나마도 소리내던 성가반과 팝송반이 없어져서 아쉽지만 노래방 교실은 남과 너무나 비교돼서 다닐수가 없다
미술반은 언제나 즐겁다. 오랫만에 미술반에서도 전시회를 한다. 액자를 고르고 그림을 재단하고 이젤을 준비한다. 역시 무엇인가 남에게 보인다는건 긴장감을 주어서 좋다. 오래동안 함께 한 어른들의 간식은 언제나 푸짐하다. 부지런하게 아침겸 점심을 준비해오니 미술 수업이 기다려지며 나도 무엇인가 챙기느라 바쁘다.
한번에 한가지만 집중하는 내가 조용하게 그림 숙제에 빠져들면 조신한 요조숙녀로 착각한다는 남편의 비웃음에도 흔들림이 없다. 잘 그린다며 일단 칭찬을 하고 냉정하게 수정할 부분을 매의 눈으로 찾아내니 고맙다
예전에는 하기 싫거나 못하는것도 해 봐야만 하는것 같았다. 남보다 처지면 어쩌나 싶어 애를 쓰고 노력하며 더 나은 결과를 기대한다. 그러나 애초부터 못하는걸 억지로 하려하면 사고가 나거나 심통이 난다.
공식에 맞춰야 정답이 나오는 수학이나 과학은 낙제였던 나는 지금도 인수분해나 방정식이 나오면 설움받은게 생각나 아직도 부르르 떤다. 끈기있고 얌전한 콩나물, 멸치, 마늘 다듬기와 한땀 한땀 뜨게질은 꽝이다.
악보에 관심없는 피아노는 몇년간 연습했지만 잠들어 얼굴에 건반자국만 남겼고, 음표 그리기는 빵점을 맞아서 음악쌤은 귀가 이상한것 같다고 병원엘 가라고 하며 합창대회 땐 난 입만 크게 벌려야했다. 체육시간에 춤을 출때는 짝을 아무도 안해줘서 무용쌤과 짝이 되어서 울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교사가 되었을때 그애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겉으로는 잘하는거는 계속 더 잘하게 노력하고, 못하는건 그저 낙제만 면하면 된다고 했지만, 그래도 담임 인지라 성적표 때문에 우린 둘 다 화이팅을 외치며 나아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되고 할머니가 되니 그렇게 꼭 해야할 이유가 없어졌다.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것만 할수있는 게으른 즐거움을 느낄 수 있어서 참 좋다. 여유가 있는 노년의 즐거움이 우리의 특권이다. 그래선지 어른들의 취미 활동은 부담이 없고 하고 싶은것을 즐겁게 하기에 결석도 별로 없고 활기차다.
실컷 게으름을 피우다 보니 어느새 한 달이 지났지만, 먼지 때문에 감기 걸릴 애들도 없고 뭐라고 하는 이 없으니 편하다. 이제야 돌돌이 로봇 청소기를 돌렸고 구석 구석엔 먼지가 뽀얗지만 그런대로 깨끗하다. 아침 일찍 남편이 출근하면 동네를 슬렁슬렁 걷고 나서, 약 먹자 하면서 수영을 다녀오고, 자고 싶은만큼 자다가 미술반에 다녀오면 이삼일은 숙제하느라 바쁘지만 즐겁다. 게으른 가운데 즐거우니 참으로 다행이다.
물론 마음에 찔리는게 많다. 이리저리 뒹굴며 계획을 세워본다. 아이고! 글도 써야 한다며 제목만 잔뜩 적어놓고, 내책을 만든다며 교정을 봐야 할 원고도 뒤죽밖죽이고, 친구들이 준 책도 읽어야하고, 바리바리 싸들고 온 것으로 밑반찬도 만들어야 되는데 난 모르겠고 아무것도 안하고 게으름으로 하루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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