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8일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에서는 도산 안창호의 날 기념식이 조용하지만 의미 깊게 진행됐다.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 곽도원 회장, 대한인국민회 기념재단 클라라 원 이사장, LA 흥사단 정문식 대표, 조성호 부총영사를 비롯한 남가주 지역 애국단체 관계자들이 참석해 도산 선생의 정신을 되새기며 계승을 다짐했다.
이날은 2018년 캘리포니아 주 의회가 도산 선생의 탄생일인 11월9일을 ‘도산 안창호의 날’로 선포한 지 7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했다. 주 의회는 도산 선생을 마하트마 간디, 마틴 루터 킹과 비견되는 지도자로 평가하며, 미주 한인사회의 초석이 된 그의 활동과 업적, 그리고 인류애에 기여한 정신을 높이 평가했다.
이날 행사는 사회자의 개회사로 시작해 국민의례, 도산 안창호의 날 제정 경과보고, 각 단체의 기념사와 축사가 이어졌다. 하지만 이날의 하이라이트는 AI로 재현된 도산 선생이 타임머신을 타고 등장한 영상 메시지였다. 화면 속 도산 선생은 “우리 땅을 떠나 이역만리 타국인 이곳 미국에 뿌리내리고 사느라 수고했다”며 참석자들에게 직접 위로의 말을 건넸다. 순간 현장에 있던 모두가 진심 어린 감동에 잠겼다. 이민 1세대인 기자 또한 화면 속 도산 선생의 따뜻한 격려에 마음이 뭉클해져, 낯선 땅에서 버텨온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깊은 울림을 느꼈다.
행사 내내 현장의 분위기와 구석구석을 꼼꼼히 살폈다. 기자의 눈에 들어온 얼굴들은 대부분 낯이 익은, 오랜 세월 한인사회를 지켜온 1세대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이 보여준 진심과 헌신은 감탄스러웠지만, 동시에 마음 한편에선 아쉬움이 남았다. 특히 이 의미 있는 행사가 결국 기자를 포함한 일부 세대의 기억과 추억으로만 머물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스쳤다. 본국에서의 인구 유입이 줄어드는 상황에서 2세, 3세들이 도산 선생의 정신과 유산을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이러한 전통이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자연스럽게 뒤따랐다.
물론 도산 선생을 기리는 3개의 대표 단체와 애국단체들이 2~3세대의 정체성 함양과 후속 세대 영입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이날 이민 1세들이 보인 진심 어린 마음을 후세대가 온전히 이어받을 수 있을지에 대한 걱정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현장에서는 2세, 3세로 보이는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지만, 그 수는 매우 적었으며, 적극적으로 행사에 참여하기보다는 참석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있는 듯 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가지 중요한 깨달음을 얻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의 정신은 단순히 과거의 위인을 기리는 숭배가 아니라, 오늘날 우리 한인사회 구성원들이 서로의 얼굴과 손길, 헌신을 통해 살아 있는 역사로 이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민 1세대가 쌓아온 전통과 정신이 다음 세대로 자연스럽게 전달되려면 단순한 행사 참여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인 교육과 관심, 그리고 꼼꼼한 기록이 필요하다. 사진과 글, 영상으로 남기고 후세에게 전하며, 현장에서 피어난 작은 노력과 헌신까지 되새기는 일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손길’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기념이다.
올해 연말, 우리는 도산 선생을 기억하는 동시에 그 정신을 지켜온 사람들의 얼굴과 손길에도 주목해야 한다. 익숙한 얼굴들의 헌신, 행사 곳곳에서 묵묵히 애쓴 이들의 노력까지 기록할 때, 한인사회는 단순한 추억을 넘어 살아 있는 역사와 기억을 다음 세대로 이어갈 수 있다. 이러한 역할은 로컬 한인 언론에게도 주어진 과제다. 단순히 행사의 결과를 보도하는 것을 넘어, 현장에서 피어난 헌신과 참여, 그리고 세대를 잇는 이야기들을 세심하게 기록하고 전해야 한다. 기록되지 않으면 사라지는 사람들, 그들을 기억하고 기록하며 다음 세대에 전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기념이자 언론의 책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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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의경 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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