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때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다. 적지 않은 수의 멤버가 함께하는 이 모임의 목적은 물론 순수한 친목도모이다.
정기적으로 모이자고 시작됐지만, 학교나 직장 생활 곳곳에서 터지는 변수들로 인해 모임은 근근이 간헐적으로 이어지고 있던 차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모임의 존폐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몇 번이고 흩어질 위기 가운데에서 근성 있게 관계의 끈들을 잘 엮어주던 한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보통은 잘 연락하지 않는 조금 이른 시간의 전화. 친구는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모임을 갖고 있지 않은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처리해야 할 일로 바빴던 나는 나중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나는 저녁에 다시 전화하겠노라고 답해놓고는 차일피일 미루다 차츰 잊어가고 있었다.
며칠이나 흘렀을까. 유난히 기운이 빠지던 어느 날 저녁. 난 친구들이 생각났고, 핸드폰을 들어 염치없게 그 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여느 때처럼 밝은 목소리의 친구는 조금 잠긴 내 목소리를 듣고는 금세 무슨 일이 있냐며 맛있는 저녁을 먹자고 했다. 나는 너무 미안하고 정말 고마웠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나를 반긴 건 그 친구가 아닌 모임의 다른 멤버였다. 친구는 얘들은 항상 이렇게 늦는다며, 잘 지냈냐는 인사를 건넸다. 너무나도 반가웠다. 어느새 약속 장소에 속속 모여드는 친구들. 그들은 덕분에 모이게 됐다며 되레 내게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자리에 모인 우리는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과도 같았다. 난 그날의 모임에서 서로를 막고 있는 어떠한 경계도 두터운 막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오늘 아침에도 만난 사람처럼 즐겁고 편했다.
그들은 완전한 내 편이 되어, 자질구레한 내 얘기에 맞장구를 쳐주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잔잔히 녹아든 우리는 아주 깊고 따뜻한 하나의 색을 뿜어내고 있었다.
문득 화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를 불후의 명작으로 만든 스푸마토(Sfumato)라는 회화 기법이 생각났다. 사물의 외곽선을 주변과 자연스럽게 섞이도록 번지듯 그리는 기법을 명명하는 스푸마토는 그림 속 다양한 소재들이 제각기 튀지 않고 전체적으로 심오한 조화를 이루는 그림이 완성되게 한다.
극도로 정밀한 붓질로 30겹 이상의 물감 층을 쌓아 약 16년에 걸쳐 정성스럽게 완성한 ‘모나리자’. 화폭 전체에 흐르는 섬세하고 부드러운 하나 됨은 그처럼 엄청난 정성과 시간의 결과였던 셈이다.
누구도 알아채지 못하던 사이 조용히 쌓이던 층층의 겹들이 모여 아름다운 한 장의 그림이 완성돼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그려야 할 인생의 명화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적 순간은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도래’하는 것이라 했던가. 내가 생각지 않았던 곳에서 만난 결정적 ‘명화’는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 멀리에 있지도 않았다. 그리고 도래를 기대한 적 없는 내게 이처럼 결정적인 감동을 주었다.
덕분에 이제 일상의 사건과 관계에 더욱 주목하게 됐다. 그 속에서 내가 누군가가 평생 간직할 일생일대의 명화를 완성하는 얇은 층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유쾌해졌다.
일상과 반복의 경이. 또 다른 명화의 도래가 기다려진다.
노유미 /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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