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돌아가실 것 같다는 소문이 우우 호들갑을 떨다가 잦아들곤 하기를 벌써 몇 년째. 꼼짝 못 하고 누워서 암 투병을 하고 계신 분을 찾아갔다.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도 아무 기척이 없다. 문이 움쩍도 하지 않는 걸 보니 오늘은 아들이 집에 없는 모양이다. 병을 앓기 전부터 청각에 이상이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못 들으신다. 이런 날은 음식을 문 앞에 두고 가야 한다. 하지만 오늘은 곰국이라 그럴 수가 없다.
개미가 몰려올텐데, 햇볕 아래에서 상할까도 걱정이다. 창문에 고개를 디밀고 안을 들여다본다. 벽 한쪽 소파에 누워있는 그 분이 보인다. 소파 쿠션 속으로 몸의 반쪽은 아예 녹아 들어간 느낌이다. 누렇게 변색 된 휠체어, 숟가락이 걸쳐진 그릇. 물이 반쯤 채워진 투명 유리컵. 눅눅한 곰팡이 냄새만 날아다닐 것 같은 방안은 고요 그 자체다.
옆 아파트의 벨을 눌렀다. 물이 뚝뚝 흐르는 고무장갑을 벗으며 젊은 여자가 문을 열어준다. 냉장고에 넣어야 하지요? 미처 부탁의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손에 들려진 냄비를 받아 안는다. 어제 저녁에도 어떤 사람이 죽을 가지고 왔고, 오늘 아침에는 홍삼 달인 차를 가지고 온 교인도 있었단다.
나만 옆집 문을 두드린 줄 알았더니 매일 보이지 않는 손길이 다녀가고 있었나 보다. 긴 병에 효자 없다던데. 이제는 사람들의 호의도 지쳤으리라. 병자를 기억에서 지운 사람도 많으리라…… 그건 나의 무심함을 합리화하려는 변명이었음을 깨닫는다.
비좁은 냉장고지만, 한 칸은 아예 옆집을 위해 비워두고 있는 이웃 여자. 죽음을 눈앞에 둔 가난한 과부의 한 끼를 위해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정승 집 애완견이 죽으면 문상객이 장사진을 이루지만 정작 본인이 죽으면 손님이 없는 것이 세상인심이라고 하는데. 그 세상을 역행하며 사는 사람들의 마음 뿌리가 닿아있는 곳은 과연 어디일까.
세상에는 아직도 아름다운 사람이 많다는 사실에 마음이 훈훈해진다. 냉장고 한 칸을 내어놓듯, 우리 사회 어딘가에는 여전히 작은 자리를 비워 이웃을 품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남의 필요에 세심하게 반응하며 배려하는 사람. 약한 사람의 눈높이에 맞춰 자신을 낮출 줄 아는 사람. 힘든 이웃에게 기댈 수 있는 어깨를 내어 주는 사람. 밝은 표정으로 긍정적인 기운을 몰고 오는 사람. 언제나 용서해 줄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진리 앞에서는 요동하지 않는 용기가 있는 사람. 어떤 색깔도 고집하지 않는 넉넉함으로 공동체를 화합시키는 사람. 어느 곳에 가서든 이런 사람을 발견한 날은 정말 기분 좋다. 그런 모임에는 자꾸 가고 싶다.
“내가 죽으면 저기 있는 소나무 옆에 묻어주게. 저 소나무는 많은 씨앗을 퍼뜨려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나를 감싸 주었어. 그렇게 해주게. 내 몸이면 그들에게 아마 2년 치 거름 정도는 될거야. “ 포리스트 카터 작가의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에 나오는 말, 체로키 인디언 할아버지 윌로 존의 유언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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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민희 소설·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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