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에 왔다. 팔십 중반에 접어든 노모를 마주하니 맑은 정신으로 활발하게 대화하고 밥을 함께 먹고 걸을 날들이 얼마나 남았을까 묻게 된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의식불명을 겪은 후로 밤사이 ‘안녕’이라는 말이 낯설지 않게 되었으니, 일 년에 한 번쯤은 엄마를 보러 와야겠다고 다짐한다. 팬데믹 전부터 시작한 한국 친정에서의 두 달 살이. 지금은 오롯이 엄마와의 시간을 위해서다. 매일 걷고 병원에 동행하고, 잔심부름과 집안일을 챙기면서 짬짬이 나의 문화 활동을 곁들인다.
올해는 확연히 다르다. 엄마 몸의 근육은 어디로 가버렸을까. 이전엔 느려도 쉬지 않고 걷던 길을 몇 차례씩 끊어가며 앉았다가 걷곤 하신다. 딸이 하는 말은 잔소리로 들리는지 콧잔등에 주름 만드는 횟수가 잦아진 엄마. 미국에서 몇 년 만에 다니러 왔을 때, 딸에게 주려고 한 장씩 모은 만 원짜리 지폐 수북이 든 봉투를 내밀던 엄마는 이제 없다. 같은 사람인데 다른 사람 같다.
성인이 되어 딱 한 번 엄마에게 편지를 썼다. 꽃무늬 편지지에 존경과 고마움의 마음을 담았다. 결혼해 외국에서 살다 보니 엄마 품이 그립기도 했고 같은 여자로서 동료애가 솟구치던 시절이었다. 한 사람으로서 엄마의 삶을 칭송하고, 엄마 본연의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던 마음이 우렁우렁했다. 하지만 그 마음은 전달되지 않았다. 부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갈피에 고이 모셔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오랜만에 읽어보니 좀 오글거리기는 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기 마련인데 그 시절 그 마음을 부치지 못한 건 못내 아쉽다. 그때만큼의 생동감은 없겠지만 엄마에 대한 내 마음의 흔적을 남길 수는 있을 테니 위로로 여길 수밖에.
암투병 중이던 K언니가 어느 해 추수감사절에 국제전화를 걸어왔다. 첫마디 건네는 말이 “너에게 고맙다는 말을 제대로 못한 게 생각나서···.”였다. 그날 언니의 말을 듣고 반성했고 결심했다. 고마운 사람에게 고맙다는 말 미루지 말기. 보고 싶은 사람은 꼭 만나기. 결심대로 잘 되지는 않았다. 마음에 새겨놓고 표현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며칠 전 개그맨 전유성 씨의 부음이 전해졌다. 그와 관련한 미담과 일화가 여기저기서 쏟아져 나왔다. 누군가는 말했다. 책으로 엮으면 너댓권은 족히 될 거라고. 내게도 그와 얽힌 작은 추억이 있다. 2000년 어느 날, 서울 삼성동 현대백화점 문화센터 일일 강좌의 강의를 마치고 나가는 그를 붙들고 말했다. “곧 미국에 들어가는데 남편과 함께 개그콘서트 방청을 꼭 하고 싶다, 좋은 추억을 만들고 싶다”고. 당시 KBS 개그콘서트 인기는 하늘을 찌를 기세였기에 방청권을 구하는 건 요즘 아이돌 콘서트 티켓 구하기보다 어려웠다. 빙긋이 웃으며 그가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매니저 전화번호였다. 우리 부부는 무사히 즐겁게 관람할 수 있었다. 오랜 시간 미루었던 “그때 참 고마웠습니다”란 인사를 전하지 못한 채 그 고마움은 이제 내 마음 속 메아리로만 남게 되었다.
다시 결심한다. 혼자만의 메아리로 남겨두지 말기로. 지금은 새 편지를 쓸 시간이다. 손으로도 쓰고 말로도 쓰고 몸으로도 쓰고. 영원히 이어갈 편지. “지금,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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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라 수필가 미주문협 부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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