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차가운 늦가을 이른 아침이다.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 ‘벽초지’수목원에 왔다. 주차장에 도착하니 대형 관광버스에서 노인들이 내리고 있다. 노인회관에서 오신 분들 같다. 십여 명의 할아버지도 부인과 함께 서로 부축하며 내린다. 할머니들은 주름진 얼굴이지만 곱게 화장하고 단풍색만큼 울긋불긋한 스카프를 매고 왔다. 두 명씩 손을 잡고 젊은 인솔자를 따라 어정어정 걷는 모습이 소풍 나온 유치원생을 보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다.
일행들과 뒤처진 등이 굽은 할머니 한 분이 연노랑, 주홍, 보라, 흰 국화 정원을 지나며 “어쩜 이렇게 예쁠까! 곱기도 해라.”하며 무릎을 구부리고 꽃 사진을 찍고 향기를 맡으며 가다가 누군가를 찾는 듯 자꾸만 뒤를 바라본다. 바로 뒤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게 미소 짓는다. 그러기를 여러 번 반복되어 나도 뒤를 돌아보았다. 십여 미터 떨어져 뒷짐지고 어슬렁어슬렁 한 할아버지가 걸어오고 있다. 햇빛에 반짝이는 진초록 수련과 머리를 푼 수양버들이 늘어진 호수 위의 다리에서 많은 사람이 사진을 찍고 있다. 할머니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고 싶은지 카메라를 만지작거리며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내가 눈치 없이 사진을 찍어드리겠다고 하자 남편이 오면 찍겠다며 사양한다.
많은 사람이 거의 다 지나가고 할머니만 남았을 때 그녀의 남편이 왔다. 할머니가 다른 사람들처럼 멋지게 자세를 취하고 미소를 지으며 할아버지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할아버지는 못마땅한 얼굴로 할머니 손에서 낚아채듯 전화기를 받아 건성으로 꾹 누르고 “그 꼴에 사진은?”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할머니는 전화기를 받아서 남편이 찍어준 사진을 보고“사진 하나 제대로 못 찍어요?”하며 울상이 되어 불평한다.”내가 당신 전문 사진사야?”할아버지가 소리를 빽 지르며 출구 쪽으로 가버린다. 할아버지는 다른 부부처럼 다정하게 걸으며 함께 사진 찍는 것까지는 포기한 아내가 안쓰럽지도 않은가 보다. 참으로 밉상인 할아버지다. 등이 굽은 것 외에는 해 맑고 고운 얼굴, 감성과 교양 있어 보이는 할머니가 안쓰럽다. 곱사등이 등 색시가 부끄럽다면 애당초 결혼은 왜 했을까? 이왕 결혼했으면 서로 귀하게 여기며 살면 좋으련만! 내 가슴이 답답하고, 아파오니 오지랖도 병이다.
호수에서는 분홍색 부리의 깜찍하고 귀엽게 생긴 수컷 원앙새가 어두운 회색 부리에 통통한 암컷을 따라다니며 애정 공세를 한다. 바로 그 옆에는 억새풀이 바람 부는 대로 하얀 솜털 머리를 서로 맞대고 속삭인다. 한 쌍의 원앙새도, 머리가 하얗게 늙은 억새풀도 서로 사랑하는데…
출구로 향하던 그녀의 남편이 뒤따라올 아내가 걱정? 됐는지 뒤돌아보며 걷다가 돌에 치여 넘어졌다. 나는 내심 고소했다. 그들의 일행들은 다 버스에 탄 모양이다. 고운 스카프에 눈물을 훔치며 맨 뒤에서 따라오던 그녀는 뛰다시피 재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넘어진 남편을 붙잡아 일으키고 흙 묻은 바지를 털어준다. 세상에 어떤 부부가 평생 살면서 갈등 없이 살겠는가? 등은 굽었지만 너그러운 마음으로 인내하는 그녀와 신체는 건강하나 마음이 굽은 남편이 살아가는 묘약이 있을까? 그 남편은 더 이상 곱사등이 색시가 부끄럽지 않은지 그녀의 팔을 의지하고 그들의 집에 데려다 줄 버스를 향해 절룩절룩 함께 걸어간다.
노란 은행잎이 그들의 머리에 앉고 지는 해가 그들과 함께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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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화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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